가수 양준일 측이 이혼 및 재혼 루머에 대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슈가맨에 출연한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가수 양준일씨,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양준일이 몰래 낳은 딸이 벌써 고등학생이라는 글이 떠 돌았는데요.
첫 부인은 딸과 함께 괌에 있다는 소식이였습니다.
부인은 빚에 허덕이다 오만 잡동사니 일을 다해가면서 아는 분이 집을 마련해주는 바람에 괌의 한국인 바에
부사장으로 잡혀 일하고 있다'는 폭로글이 유포되었습니다.
이는 3월 작성됐던 것이지만, 최근 들어 재유포되며 논란이 야기되었는데요.
이에 대해 양준일 측은 "사실무근"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더욱 더 사실이 공론화 될 수 있도록 널리 퍼져야 할듯 한데요.
양준일 측 관계자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봄에 팬의 제보로 그 댓글을 본 적은 있다."며,
그때 고소하려다 댓글이 사라져서 문제삼지 않기로 했었지만, 현재는 어떻게 대처할지는 생각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양준일은 지난해 '탑골GD'로 유명세를 타던 중 JTBC '슈가맨3'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각종 인생 역경을 이겨내고 뒤늦게 꿈을 이룬 그의 스토리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고 각종 예능 프로그램과 광고계의 러브콜이 쏟아졌는데요.
8일에는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열린 '2020 브랜드 고객충성도 대상 시상식'에 참석해 '핫 아이콘' 부문 수상의 영광을 안은 바 있습니다.
이후 가수 양준일이 일각에서 제기된 이혼설 및 재혼설 등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관계자는 "올해 봄에 팬이 제보를 해서 이와 관련한 댓글을 확인했다"고 답했습니다.
당시 "이와 관련해서 고소를 하려고 했으나 댓글이 삭제돼 결국 문제를 삼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앞서 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양준일이 몰래 낳은 딸이 고등학생이고 첫 부인은 괌에 있다"는 내용이 다시금 화제가 되자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답한 것인데요.
현재 '탑골 GD'라는 타이틀로 화제를 모으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그,
가수 양준일이 이혼과 재혼설에 휘말린 가운데, 양준일 측은 사실무근이라고 루머에 반박했습니다.
양준일은 1991년 '리베카'로 데뷔했으나 당시 큰 조명을 받지 못했던 가수입니다.
그러나 지난해 90년대 음악방송 스트리밍 서비스가 화제를 모으면서 '탑골GD'로 화제를 모으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이어 JTBC '슈가맨3'에 출연하면서 근황을 공개해 수만 명의 팬덤이 결집하는 등 새롭게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양준일은 팬미팅도 벌이고, '양준일 MAYBE 너와 나의 암호말'이란 에세이도 출간했는데요.
피자, 홈쇼핑, 비타민제 등 여러 브랜드 광고모델로 활약하면서 뒤늦게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이어 TV와 라디오 등을 가리지 않고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는 지금,
나아가 '리베카' '댄스 위드 미 아가씨' 등 발표한지 30년이나 된 노래들도 MBC '쇼! 음악중심' 등 국내 주요
음악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진풍경을 낳기도 했습니다.
지난 8일에는 '2020 브랜드 고객충성도 대상'에서 '핫 아이콘' 부문을 수상하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과거 2001년에는 V2라는 혼성 그룹으로 잠깐 활동한 후 다시 연예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데뷔 30여 년 후인 2019년에 유튜브를 통해 과거 영상의 춤, 노래, 패션 등의 다양한 모습들이 재조명받게 되었는데요.
노사연의 제보로 슈가맨을 통해 양준일 신드롬을 만들어 내며 다시 미국에서 한국으로 소환되어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부모를 따라 베트남에서 출생하고 홍콩, 일본, 한국에서 살다가 9살 때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가서 정착했다고 하네요.
어린 시절에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춤을 좋아하는 아이였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또래 아이들이 시비를 걸어 다투는 일이 있었지만,
중학교 시절에는 춤을 잘 춰서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할리우드 1세대 한국 배우이자 교수로,
같은 교회에 다니며 친분을 쌓았던 故 오순택과의 식사 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너는 한국이나 일본에서 자랐으면 연예인이 됐을 아이'라는 말로 가족들 모두 충격을 받고 식사자리를 마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고등학교 2학년 재학시절 친구와 함께 오른 무대에서 음악에 재미와 흥미를 느껴 본격적으로 가수를 준비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USC 재학 중, 당시 가요제 심사위원으로 미국에 왔던 작곡가 이범희의 눈에 띄어 한국에서 데뷔했습니다.
1집은 아세아레코드, 2집은 서울음반을 통해 발매되었다고 합니다.
1991년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신인 가수들을 위해 마련된 '병아리 무대'를 통해 공중파에 데뷔했는데,
당시 동시에 무대에 섰던 가수로 심신, 윤상, 박정운 등이 있었다고 하네요.
노래 자체는 동 시대의 다른 한국 가요에 비해 상당히 미국 스타일에 근접해 있어서,
좋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다만 마른 몸매에 큰 키와 긴 머리, 지나친 미국식 퍼포먼스, 노래에 심히 몰입해서 정신없어 보이는 춤 등은
1990년대 초반의 코드와 맞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가요차트에서도 음방 1위는커녕, 상위권과는 거리가 멀었다는데요.
당시 트렌드에 맞지 않아 대중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한 케이스라고 합니다.
당시 미국 팝계의 뉴 잭 스윙, 하우스 음악 트렌드를 가요에 이식하려 시도했다고 합니다.
뉴 잭 스윙 음악은 1992년 3월 서태지와 아이들 1집, 동년 8월 현진영 2집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으며
본격적으로는 1992년 11월에 발매된 양준일 2집 앨범과 1993년 4월 발매된 듀스 1집을 통해 한국 가요에 접목되었다네요.
터보나 룰라가 춤의 트랜드를 일부 계승하면서 본격적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한 것으로
괜히 시대를 앞서갔다는 말이 나온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 당시 <리베카>는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표절곡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리베카의 원곡은 이범희가 작곡한 '전원의 이별'이란 곡으로 1987년 발매된 이명호의 2집 앨범과 1988년 발매된 모아모아의 앨범
〈방황의 끝〉에 수록되어 있다. '전원의 이별'에서 편곡을 거친 후, 양준일이 새로 가사를 쓴 곡이 리베카라고 합니다.
다른 활동곡들인 <가나다라마바사>, <Dance with Me 아가씨>는 양준일이 직접 작사/작곡한 곡들이라고 합니다.
당시 다른 방송사들에서 양준일에 대해 보수 시각 일색이었던 것과는 달리,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SBS에서는 양준일을 열심히 밀어 주었다고 하네요.
당시 SBS의 간판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쇼! 서울서울에서는 반고정에 가까울 정도로 자주 등장했으나,
당시 서울 등 수도권에서만 본방송으로 시청이 가능했던 한계,
그리고 극과 극으로 갈렸던 대중의 반응 때문인지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네요.
또한, 중간중간 콩트 설정으로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언어 문제로 웃기만 하자 MC 정재환에게 '말 좀 하세요.'
라며 핀잔을 듣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SBS를 포함하여 의외로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는데요.
다만 당시 방송가는 재미교포 출신으로 한국말이 서투른 양준일의 어리숙한 면을 희화화시켜 양준일의 이미지를 많이
소모시키는 역할로만 활용하였고, 현재 시각에서는 충분히 출연자를 배려하지 못한 것에 비난을 받을 요소가 충분하지만,
당시 보수적이었고 큰 방송사가 세 군데만 있었던 환경이었기 때문에 양준일로써는 자신의 노래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뛸 수밖에 없었다네요.
그럼에도 양준일은 방송 출연을 통해 자신의 노래를 홍보할 수 있기 때문에 모욕감을 감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활동 당시엔 느끼하고 이상하다는 평가가 많았고, 2집 후속곡 <가나다라마바사>의 중반부에는 양준일 스스로
“여잔지 남잔지 모르겠다” 등 세간의 평가를 셀프디스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 당시의 미남 기준이 지금과 다소 다른 것도 있지만, ‘기생오라비’라 불리우는 여린 미형 외모에 마른 체구,
특히 긴 파마머리까지 한 그는 기성 세대들에게 좋지 않은 인식을 주기 쉬웠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양준일을 좋아하면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았다는 과거 팬들의 증언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패션 또한 지금 보기에도 촌스럽지 않게 잘 입었다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엔 단정하지 않게 보였고, 여기에 방방 뛰어다니며 생소한 장르의 음악을 불러 대니 대놓고 좋아하기엔 한계가 있었다네요.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오늘날에 와서야 재평가의 요소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991~1993년에 활동하였을 당시 엇갈린 시선과 함께 크게 뜨지 못할 수밖에 없었습니다.